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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음악이야기
피아노의 시인 ,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 본문
쇼팽의 일생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쇼팽은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쇼팽은 낭만주의 피아노 역사상 프란츠 리스트와 함께 최고의 업적을 이룩한 작곡가이다. 폴란드인이 자부심을
갖고 존경하는 폴란드 최고의 위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폴란드의 관문 바르샤바의 공항 이름도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이다.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1927년 만들어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도 폴란드 역대 대통령들의 중요한 공무이자 매년 국가지정 관광시즌으로 지정될 만큼 피아노 분야 최고 위상의 콩쿠르로 명망을 떨친다.
그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으며, 8살 때는 폴로네이즈 두 곡을 작곡했을 정도였다. 어린 쇼팽의 재능은 바르샤바의 귀족들에게까지 알려져 그들 앞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쇼팽이 얼마나 연주를 잘 했는지, 당시 폴란드 언론이 "천재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만 태어나는 줄 알았지만 우리나라에도 드디어 천재가 태어났다." 라고 극찬했을 정도였다.
이후 1822년에 바르샤바 음악원의 창설자인 유제프 엘스네르(Józef Antoni Franciszek Elsner)를 통해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우게 됐고, 1825년 중학생 때는 러시아 황제 앞에서 연주할 기회를 얻게 됐다. 이후 피아니스트 바츨라프 빌렘 뷔르펠(Václav Vilém Würfel)을 사사하며 바르샤바 음악원을 다녔다.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한 후, 1828~29년에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면서 음악의 중심지인 빈으로 가서 피아니스트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는 사이 조국 폴란드에서 러시아에 대항해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됐고, 빈을 떠나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했을 때 러시아군의 잔혹한 진압으로 혁명이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때 겪은 분노와 조국과 집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 등이 뒤엉켜서 쓴 곡이 에튀드 '혁명'으로 알려져 있다. 쇼팽의 집도 당시 러시아군의 약탈로 사라져 있었고, 러시아군은 그의 집에 있던 피아노까지 도끼로 작살내 땔감으로 썼다. 이를 보고 쇼팽은 자신의 일기에 "하느님, 당신은 러시아인이십니까?"라고 적으며 울분을 토로했다.
이후,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간 쇼팽은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후대에 널리 알려진 피아노 곡을 작곡하게 되었다.
작품성향
쇼팽은 일평생 거의 피아노를 위한 곡 만을 작곡했다. 가곡이나 다른 악기를 위한 곡 같은 다른 장르의 작품도 있긴 하지만 피아노 곡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첼로 소나타나 가곡과 같은 곡이라 하더라도 그의 모든 작품에는 피아노가 들어간다. 당대는 낭만주의 음악의 시대였음에도 쇼팽은 자신의 음악이 낭만주의로 평가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초기에는 몇몇 사람들에겐 낭만주의자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대담한 전조나 그 당시 절대적으로 기피됐던 불협화음, 생소한 기교 등은 그를 음악사에서 완전한 돌연변이로 만들다시피 했고 심지어 그를 제대로 된 음악교육을 받지 못한 아마추어 음악가로 오해하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의 음악은 당시에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음악이어서 그와 비슷한 곡을 작곡한 몇 사람은 사후 쇼팽과 대등한 명성을 얻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고트샬크(가초크)와 스테판 헬러가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엔 쇼팽이 낭만주의 작품의 대명사처럼 불리며, 대중들이 가장 잘 아는 낭만주의 피아노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피아노로 다양한 음색을 구현하기 위해 페달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장식음이 대부분 기교적이기만 한 악절 정도로 취급됐던 당시 쇼팽은 장식음을 기능적으로 사용하여 선율의 하나로서 취급하여 루바토 기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동시대의 작곡가이자 쇼팽의 동료이기도 했던 리스트의 음악에 비해 난이도 면에서는 왠지 모르게 어렵다는 평가를 하지 않는 듯하지만 피아노를 치다가 피아노를 부숴버리고 싶을 정도로 애매하게, 왠지 모르게 어려운 패시지가 눈에 엄청 자주 띈다. 리스트와는 다르게 왠지 어렵게 들리지는 않으나 상당히 어려운 곡들이 많다.
이유를 따지기에 먼저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리스트의 작곡 스타일 자체가 웅장한 효과, 화려함만을 부각시키기 위한 악절들을 상당히 많이 썼다. 즉 나쁘게 말하자면 곡 전체에 있어서 안 써도 될 부분을 남발했다는 점이다. 쇼팽은 그런 악절들을 거의 쓰지 않았고 기교 자체를 중시하는 게 아니라 내용적인 측면에서 기교적인 악절을 단순히 도구로 취급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리스트보단 기교적인 효과를 중시하는 악절들이 상대적으로 눈에 덜 띄거나, 어떤 부분은 단순하게 봐선 어려운 악절인지 아닌지 파악하기 어렵게도 쓰여있다. 그런 면에서 슈만이나 쇼팽의 몇몇 곡들은 치기 매우 어려운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단지 악보를 읽고 손놀리는 부분을 익히는 데에서만 어려움을 느끼는 것으로 테크닉적인 난이도를 평가하는 건 절대 금물이다.
쇼팽의 첫 곡은 폴로네이즈이고 마지막 곡은 마주르카이다. 폴로네이즈와 마주르카는 둘 다
폴란드의 전통 춤곡이다.
쇼팽의 시신은 프랑스 페르 라셰즈 묘지에 있지만 그의 심장은 폴란드 바르샤바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쇼팽의 시신에서 적출된 심장은 그의 누나인 루드비카가 고향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고국으로 가져와 폴란드 성 십자가 성당 기둥에 묻었고, 쇼팽은 1894년 심장이 없는 상태로 프랑스 묘지에 묻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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